아이슬란드의 역사
아이슬란드의 전체 역사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아이슬란드의 첫 정착민과 그들의 삶부터 시작해 현재의 민주 공화국으로 발전한 과정을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아이슬란드의 지리, 기후, 세계에서의 위치가 아이슬란드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아이슬란드 역사에서 가장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사건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면 계속 읽어봐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아이슬란드 국민은 아이슬란드라는 젊은 나라의 역사에서 흥미진진하며 다양한 의견이 가득한 새 장을 열고 있습니다. 매년 수백만 명의 방문객이 아이슬란드를 찾고, 이민자 유입이 계속되며, 이 두 가지에 따른 도시 개발이 진행되면서 좋든 싫든 과거의 아이슬란드는 빠르게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미 레이캬비크는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조금 큰 스칸디나비아의 마을처럼 보였던 레이캬비크는 이제 고급 호텔, 관광 센터, 다양한 관광 명소를 건설하며 새롭게 변모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 뒤이은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극장, 레스토랑, 박물관, 바 등이 생겨나는 작은 도시였던 수십 년 전과 비교하면 큰 차이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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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캬비크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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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건축의 역사를 소개합니다.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의 역사상 이러한 변화는 단 몇 번밖에 일어나지 않았지만, 확실한 점은 지금이 바로 도시의 르네상스인 것으로 보입니다.
전형적인 아이슬란드 거리였던 라이캬르가타(Laekjargata)나 뢰이가베구르 같은 곳은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변화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이 변했음을 눈에 띄게 상기시켜 준다는 의미입니다. 아이슬란드의 도시, 국가, 인구는 매일 변화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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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변모는 '오즈의 마법사' 주인공 도로시의 대사를 떠오르게 만듭니다. "우리는 더 이상 캔자스에 있지 않아." 급속한 성장을 겪어온 아이슬란드에도 적용되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한때 고립된 북대서양의 섬나라였던 아이슬란드는 다양한 변화 끝에 전 세계 여행객의 마음속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관광객, 사업가, 예술가, 음악가, 학생, 구직자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아이슬란드를 풍요로운 기회의 땅으로 여기고 찾아왔습니다. 이들의 눈에 비친 아이슬란드는 여전히 세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정체성과 역사를 정립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크리에이티브 커먼스. 사진 촬영: Olaus Magnus.
관광업은 2008~2011년 금융 위기 당시 급락하던 아이슬란드 경제의 구세주 역할을 해왔습니다. 경제를 회복하고 전년도 GDP를 넘어선 아이슬란드의 미래는 그 어느 때보다 밝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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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의 역사를 보면 어떻게 현재의 독특하고 기념비적인 순간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집니다. 또한 미래의 도전에 맞서기 위해, 초기 정착부터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 선언, 그 후의 논쟁의 여지가 있는 시기와 영향력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이슬란드의 매혹적인 역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하겠습니다.
아이슬란드의 나이
아이슬란드는 약 7천만 년 전에 처음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섬 하부의 거대한 마그마 주머니가 형성 과정의 촉매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이슬란드 플룸(Iceland Plume)으로 알려진 마그마 주머니의 근원은 지구 맨틀 내부 2,000미터 안쪽에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류가 출현하기 훨씬 전부터 일련의 수중 분출을 일으켜, 오늘날 아이슬란드라 불리는 섬을 빠르게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슬란드를 만들어 낸 거대한 힘은 지금도 여전히 화산 폭발이나 지진으로 목도됩니다. 1963년부터 1967년까지 이어진 수중 화산 폭발이 베스트만나이야르 제도의 수르트세이(Surtsey) 섬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수르트세이 섬은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연구 관계자만 섬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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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 중앙 해령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기에 아이슬란드에는 각종 지열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전국에 200개가 넘는 화산, 간헐천, 화산 폭발로 생긴 균열이 가득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아이슬란드의 화산 역사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다양한 화산 지형을 만날 기회가 여러 번 있을 뿐 아니라, 지표면 위로 노출된 북아메리카와 유라시아 대륙 지각판의 모습까지 볼 수 있습니다. 씽벨리르 국립공원에서는 대륙 지각판이 아주 조금씩(1년에 1밀리미터) 벌어져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이러한 특징 덕분에 아이슬란드 유일의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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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의 원초적 힘은 오래전 잊혀진 고대 아이슬란드의 역사로 간주하기 쉽지만, 아이슬란드의 대지는 여전히 많은 성장통을 겪고 있습니다;
200년간의 침묵을 깨고 2010년에 폭발한 만년설 화산 에이야퍄틀라요쿨이 좋은 예입니다.
수 세기에 걸쳐 압력이 쌓인 끝에 에이야퍄틀라요쿨 화산은 결국 폭발로 이어졌고, 아이슬란드의 미래를 바꾼 거대한 화산재 구름을 만들었습니다. 유럽 본토의 항공 교통을 중단시킨 한편, 동시에 아이슬란드의 관광 산업을 촉발시켰습니다. 화산 폭발로 인해 107,000편의 항공편이 취소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흥미로운 결과라 하겠습니다.
에이야퍄틀라요쿨만큼 영향력이 크진 않았지만, 수년 동안 수많은 화산 폭발과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2014년과 2015년에 바로아르분가(Baroarbunga) 성층화산에서 발생한 홀루흐뢰인 용암 지대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2011년에는 그림스보튼 화산에서 분출이 시작되었으며, 2017년에도 헤클라(Hekla) 화산 하부 토양에서 분화 조짐이 관찰된 바 있습니다.
아이슬란드의 정착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크리에이티브 커먼스. 사진 촬영: Johan Peter Raadsig.
아이슬란드의 초기 정착민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란드나마보크 정착 기록서에서 주로 발견됩니다. 5부로 구성된 중세 필사본인 란드나마보크는 9세기와 10세기에 아이슬란드를 발견하고 정착한 노르웨이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놀랄 만큼 오래된 기록인 란드마나보크는 1,400여 개의 정착지와 3,000여 명의 인물, 일화, 가계도, 북유럽 판테온의 이야기 등 정착 시대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사가 학술지 시구로우르 노르달(1886년 9월 14일부터 1974년 9월 21일까지 간행)은 란드나마보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어떤 게르만 민족도, 사실 북유럽의 어떤 국가도, 정착기 이후 첫 5세기 동안 아이슬란드 문학이 가진 독창성과 탁월성에 비견될 만한 중세 문학을 갖고 있지 않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크리에이티브 커먼스. 사진 촬영: 아르니 마그너스손 협회.
다행히 아이슬란드어는 고대 노르웨이어에서 거의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노르웨이 원어민도 거의 1,0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아이슬란드어를 쉽게 구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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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아이슬란드어 이름은 아이슬란드 최초의 정착민에서 유래된 것으로 세대 간 연결성을 제공합니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사가를 배웠기 때문에 사가와 다채로운 캐릭터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이슬란드의 발견 시기
아이슬란드는 오랫동안 가장 큰 무인도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스와 로마 문헌에는 툴레라는 땅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를 아이슬란드로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일각의 추측일 뿐입니다. 기원전 330년경 그리스의 탐험가 파이테아스(Pytheas)가 자신의 여행을 기록한 여행기에 언급된 내용입니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초기 아일랜드 수도승들이 아이슬란드를 발견하고 북유럽인이 도착하기 전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수도사 디쿠일의 기록은 8세기 후반 아이슬란드에 거주했던 성직자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이슬란드 최초의 정착민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크리에이티브 커먼스. 사진 촬영: Guerber, H. A. 무편집본.
란드나마보크에는 '더 파파르'로 알려진 아일랜드 수도사들이 언급됩니다. 이들이 아이슬란드 최초의 거주민으로, 이후 북유럽 정착민들이 발견한 책, 십자가, 종을 남겼습니다. 이처럼 아이슬란드의 중세 자료는 상세한 세부 사항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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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아리 쏘르길손(Ari Thorgilsson)이 작성한 이슬렌딘가보크(아이슬란드인의 책)에서는 "북쪽의 이교도"를 피해 섬을 떠난 "방랑하는 기독교인"이 등장합니다. 두 가지 예 모두 아일랜드 수도사들이 공식 정착 시대 이전에 아이슬란드에 거주지를 세웠다가 떠났음을 암시합니다.
스칸디나비아의 선원 플로키 빌게로아르손(Floki Vilgeroarson)은 어느 혹독한 겨울 피오르에서 흘러나온 유빙을 발견한 후 아이슬란드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까마귀의 플로키'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아이슬란드까지 항해를 떠난 최초의 북유럽인입니다. 플로키의 이야기는 란드나마보크에도 담겨 있습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크리에이티브 커먼스. 사진 촬영: Furfur. 무편집본.
잉골푸르 아르나르손은 아이슬란드 최초의 영구 정착민으로 알려져 있으며, 처남인 효르레이프르 흐룸마르손과 함께 섬에 도착했습니다. 효르레이프르 흐룸마르손은 지금의 비크 마을에서 동쪽으로 위치한 효르레이프스호포이 산에 정착한 후 노예들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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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 따르면 잉골푸르는 조각된 나무 기둥 두 개를 배 밖으로 던진 후 나무 기둥이 떨어진 곳에 정착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나무 기둥은 오늘날의 레이캬비크 지역에서 발견되었고, 잉골푸르는 자신의 맹세에 따라 874년 가족과 함께 이곳에 정착했습니다.
이들이 아이슬란드 원주민의 시초입니다. 다른 북유럽 국가와 달리 아이슬란드에는 토착 주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잉골푸르의 뒤를 이어 노르웨이 하랄드 왕의 압정을 피해 족장들이 수십 년 동안 아이슬란드로 대거 이주했고, 약 60년 만에 아이슬란드는 완전한 정착지가 되었습니다. 서기 930년경에는 아이슬란드의 모든 경작지에 정착 마을이 생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렇듯 오랜 기간의 성장을 거치면서 정착촌이 너무 커지자 아이슬란드는 새로운 입법 기관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전국 단위 의회 알씽기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초기 아이슬란드의 생활과 기독교의 수용
최초의 정착민 당시 아이슬란드의 약 40%가 천연 자작나무 숲으로 덮여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정착민들이 배, 집, 농장을 짓는 데 자작나무를 사용하면서 빠르게 고갈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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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 사용되지 않은 나무는 난방을 위해 태웠습니다. 무분별한 목재 사용으로 인해 아이슬란드의 삼림은 한 세기 만에 완전히 벌채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토양 비옥도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14세기까지만 해도 아이슬란드 정착민들은 전통적인 바이킹 롱하우스를 지었습니다. 이후 목재가 부족해지자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두 개의 직사각형 잔디 떼를 자른 다음, 집 내부 벽에 쌓아 만든 주거 형태인 아이슬란드 전통 가옥 잔디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잔디 집은 창문과 문을 위한 공간은 충분했지만, 단열과 난방 효과가 미미했습니다. 방 중앙에 큰 불을 피워야 했기 때문에 호흡기 질환을 자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또한 집을 언덕에 지어야 해서 지붕이 잔디로 된 경우가 많았고, 비 피해 때문에 잦은 수리가 필요했습니다.
척박한 아이슬란드에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초기 주민들은 외부 세계와 교역을 해야 했습니다. 아이슬란드에는 가금류, 소, 양, 말, 돼지, 생선 등 특정 자원이 풍부했지만,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필수품과 사치품이 늘 부족했습니다.
아이슬란드의 상인들은 주로 농부였기 때문에 주 수입원인 농지를 떠나 많은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었습니다. 무역은 주로 인근 스칸디나비아와 유럽으로 향하는 단거리 항로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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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란드에서는 바다코끼리의 상아, 모피, 가죽을 수입했으며 비잔티움에서는 보석, 은, 장신구, 포도주 같은 고급품을 수입했습니다. 영국은 초기 아이슬란드인들에게 밀, 주석, 꿀, 보리를 제공했고 러시아와 동 발트해 지역은 보석의 일종인 호박과 노예를 비슷한 비율로 공급했습니다.
한동안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스칸디나비아에 살던 조상들의 구전 전통에 따라 북유럽 신들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기 995년 올라프 트리그바손이 노르웨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노르웨이 통치하의 모든 국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 힘을 쏟기로 결정했습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크리에이티브 커먼스. 사진 촬영: Haukurth.
당시 아이슬란드 또한 노르웨이 통치하에 있는 이교도 국가 범주에 속했고, 올라프는 여러 선교사를 보냈지만 부분적인 성공만 거두었습니다. 서기 999년, 또 한 번의 개종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올라프는 아이슬란드로 향하는 모든 무역로를 차단하고 아이슬란드 상선의 노르웨이 항구 입항을 거부했습니다.
이로 인한 아이슬란드의 내전을 피하고, 아이슬란드가 기독교 국가가 될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이교도 출신인 쏘르게이르 쏘르켈손이 법률 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논쟁의 양측 사이에서 평화로운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인물이란 좋은 평판 덕분에 선출되었다고 합니다.
하루 밤낮을 모피 담요 아래서 고심하던 쏘르가르는 마침내 아이슬란드가 새로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는 북유럽 신화 속 우상을 폭포에 가져와 던져 버리며 개종을 선언했습니다. 아이슬란드의 기독교 개종 선언 무대가 된 고다포스는 오늘날 "신들의 폭포"로 불리며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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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르가르는 북유럽 신에 대한 예배를 사적으로 허용하고, "잉여 아동의 노출"(영아 살해 -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섬이 일정 수의 인구만 수용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과 말고기 소비를 금지시켰습니다. 아이슬란드인 사이에서는 뿌리 깊은 문화적 습관이었지만, 기독교 가르침에는 정면으로 위배되는 사항이었습니다. 이후 교회가 아이슬란드를 완전히 장악하자 이러한 관습은 빠르게 금지되었습니다.
아이슬란드 내전: 스투를룽의 시대
13세기에는 스투를룽의 시대로 알려진 내전이 아이슬란드를 휩쓸었습니다. 1220년, 아이슬란드의 주요 부족 족장들 사이에서 일어난 분쟁으로, 아이슬란드가 노르웨이 왕 하콘의 통치 대상으로 남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전쟁이었습니다. 이 갈등의 시기는 당시 아이슬란드의 강력한 가문인 스투를룽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스노리 스투를루손은 스투를룽 부족의 족장이자 노르웨이 왕의 가신으로, 스노리의 조카 스투를라 시그흐바츠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삼촌은 사가 작가로 더 유명하지만, 스툴라는 노르웨이 군주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라이벌 부족과 공격적으로 전쟁을 벌이며 이름을 알렸습니다. 아이슬란드 역사상 가장 큰 전투로 알려진 오를릭스타오이르 전투에서 스투를라가 크게 패배하면서 이 전쟁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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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음 해에도 분쟁은 계속되었고 노르웨이 왕은 중간에서 문제를 가중시킬 뿐이었습니다. 족장이자 스투를라의 적대자 중 한 명인 기수르 토르발드손 또한 노르웨이 왕에 의해 족장으로 임명된 인물입니다. 기수르는 왕의 노력에 많은 힘을 실어주었고, 마침내 1262년 구 언약이라 불리는 감리 사트말리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협정으로 아이슬란드 연방은 종식되었고 아이슬란드는 노르웨이 왕국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한 세기 후 아이슬란드는 덴마크에 귀속됩니다.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 3세는 아이슬란드 사람들에게 개방적인 종교 관습을 버리고 루터교 개종할 것을 강요했으며, 그 결과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루터교 신자로 남아 있습니다.
라키 화산 폭발과 안개 고난
18세기 1783년 6월부터 1784년 2월까지 아이슬란드에서는 라키 화산이 격렬하게 분화하여 아이슬란드 시민 9,000이 사망하는 재앙이 발생했습니다. 스카프타렐다르(스카프타(Skafta) 화재)로 알려진 화산 폭발입니다. 용암으로 인해 아이슬란드 가축의 80%로 추정되는 거의 모든 가축이 전멸했고, 아이슬란드 인구 최대 4분의 1을 사망에 이르게 만든 기근이 발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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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와 그 전주에는 화산재, 화산 유리(가는 털모양으로 굳어진 용암), 유황과 질산염이 가득한 비, 모래 섞인 비 등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독극물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풀을 뜯거나 풀밭을 걷는 가축의 주둥이, 콧구멍, 발이 밝은 노란색으로 변했다. 모든 물은 미지근하고 하늘색으로 변했고, 자갈길은 회색으로 변했다. 불이 점점 커지고 정착지에 가까워지면서 땅의 모든 식물이 타서 시들고 회색으로 변해버렸다."
문명 세계가 경험한 최악의 굶주림 중 하나인 이 시기는 영어로는 '안개 고난', 아이슬란드어로는 '모오우하로인딘(Moouharoindin)'으로 불립니다. 굶주림이 시작되고 날씨가 제멋대로 변하기 시작하면서 아이슬란드의 사회 질서가 무너지고 약탈이 빈번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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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굶주림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열기나 대기를 가득 채운 유독 가스로 인해 사망했습니다.
영국의 성직자 길버트 화이트는 이 시기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열기가 매우 심해서 정육점의 고기는 도축 다음 날에 거의 먹을 수 없게 변했다. 파리가 차선과 울타리에 너무 많이 몰려들어 말을 괴롭혔기에 말을 타는 게 어려울 지경이었다. 시골 사람들은 태양의 붉고 지독한 모습을 미신적인 경외감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크리에이티브 커먼스. 사진 촬영: Eugène Delacroix.
화산 폭발은 아이슬란드 외 지역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는데, 북미, 아프리카 사헬(Sahel) 지역, 유럽 등 멀리 떨어진 곳까지 화산 폭발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프리카와 인도의 몬순 주기를 변화시켰으며, 이집트에서는 인구의 ⅛을 감소시킨 광범위한 기근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연이어 발생한 프랑스의 빈곤과 식량 부족은 역사적인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아이슬란드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크리에이티브 커먼스. 사진 촬영: army.mil.
아이슬란드 근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은 20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44년 6월 17일, 투표에 참여한 아이슬란드 국민의 97%가 덴마크로부터의 독립에 찬성하면서 아이슬란드는 마침내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이 투표는 덴마크가 침략 독일군에 항복한 지 불과 4년 만에 이루어졌고, 이 때문에 중립국이었던 아이슬란드는 다소 불안정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아이슬란드가 애초에 전쟁 추축국으로부터 위협을 받은 적이 있었는지 궁금해집니다.
일단 전 세계에서 아이슬란드의 위치는 국제 전쟁 참여당사자 모두에게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이슬란드는 동쪽으로는 유럽 본토, 서쪽으로는 북미 대륙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서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이슬란드에서 항구든 비행장이든 군사 기지를 운영할 경우 광활하고 취약한 바다에서 해상 및 항공 교통을 장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양쪽 육지에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전술가에게는 매우 탐나는 위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크리에이티브 커먼스. 사진 촬영: Oxyman.
1930년대 초만 해도 독일은 아이슬란드 점령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나, 노르웨이와 덴마크 침공 작전인 베저위붕 작전 이후 연합군은 독일의 빠른 태세 전환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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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영국은 북대서양 지역 통제권에 대한 위협을 느꼈고 아이슬란드 수도에 신속하게 전보를 보내 "교전국이자 동맹국"으로서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이후 아이슬란드에 기지를 건설하여 북극 지역 순찰대를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레이캬비크는 자국의 중립 위치를 확인하며 영국의 요구를 수용했습니다.
다음 날인 4월 10일, 아이슬란드 의회는 덴마크가 아이슬란드 지원 의무를 이행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모든 권한을 국내 정부에 이양했습니다. 이틀 후, 영국이 이웃 페로 제도를 침공하는 발렌타인 작전이 벌어졌습니다. 돌이켜 보면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한 명확한 징조라 하겠습니다.
5월 6일,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아이슬란드가 추축군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아이슬란드의 군사 기지 건설이 필수적이라는 의견을 전쟁 내각에 피력했습니다. 더불어 아이슬란드 정부와의 외교적 노력이 더 진행되면 영국의 침공 계획이 독일군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사전 경고 없이 침공하는 것이 더 전략적인 조치라고 주장했습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크리에이티브 커먼스. 사진 촬영: USMC 기록보관소.
당시 영국에는 아이슬란드 점령 작전이 실패할 것이라는 우려가 거의 없었습니다. 아이슬란드에는 상비군이 없었고 독일 저항군은 소수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5월 3일, 영국 외무부 차관 알렉산더 카도간(Alexander Cadogan)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8시 집 도착. 식사하고 일했다. 다음 주 아이슬란드 침공 계획. 아마 너무 늦을 것 같다! 여러 무리의 새끼 오리를 보았다."
포크 작전으로 알려진 아이슬란드 침공 계획은 우발적으로 실행되었습니다. 아이슬란드에 진입한 영국군 중에는 아이슬란드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없었고, 사용했던 지도의 대부분은 기억을 더듬어 그린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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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아이슬란드 양측 모두에게 다행스럽게도, 아이슬란드 주민들은 레이캬비크를 정찰하는 영국 정찰기를 발견하고 영국군이 곧 도착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파악했습니다. 마침내 영국군이 도착했을 때,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보급품 하역을 도와주는 등 협조적인 태도를 보여 영국군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사진 출처:위키미디어, 크리에이티브 커먼스. 사진 촬영: 영국 왕실 해군.
독일 영사관에 도착한 영국군은 저항 세력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습니다. 영국군이 발견한 것은 기밀문서를 불태우는 도중에 불이 붙은 욕조와 아이슬란드가 중립국이라고 화를 내며 항의하는 게를라흐(Gerlach) 영사뿐이었습니다.
덴마크도 중립국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 후 독일 영사는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덴마크 해협에서 빙산과 충돌한 독일 화물선 바히아 블랑카 (Bahia Blanca) 호에서 구조된 비무장 독일 선원 62명도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전쟁 중 아이슬란드에 주둔한 영국군과 캐나다군은 미군에게 바톤을 넘기게 됩니다. 영국은 다른 전선에서 병력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에 당시 중립국이었던 미국에게 아이슬란드 장악을 요청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케플라비크 국제공항, 레이캬비크 국내선 공항, 항구, 병원, 도로망 등 다양한 인프라 개발이 이루어졌습니다. 엄청난 경제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조치는 아이슬란드 국민 다수에게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들은 연합군에 협조하면서도 중립국 위치에 대한 항의를 계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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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군대가 아이슬란드 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았습니다.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외국군은 아이슬란드 토착 남성 인구의 50%를 차지했고, 현지 남성들은 많은 아이슬란드 여성들이 새로 도착한 외국 군인들에게 열광하는 모습을 재빨리 알아차렸습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크리에이티브 커먼스. 사진 촬영: 미국 육군.
외국군과 성관계를 맺은 것으로 밝혀진 자국 여성들을 매춘 및 반역죄로 기소한 "테 사태(Te Situation)" 또는 아스탄디오의 발생 배경이기도 합니다.
1941년 아이슬란드 경찰은 500명이 넘는 여성을 추적했으며, 그중 많은 여성이 아이슬란드 서부의 클레프퍄른스레이키르(Kleppjarnsreykir) 시설 등지에서 비인도적인 환경과 독방 감금에 시달렸습니다. 외국군과 현지 여성 사이에서 출생한 아이들은 아스탄드보른(astandsborn, 상황의 아이)으로 불렸습니다.
아이슬란드의 독립 선언
아이슬란드의 헌법 국민투표는 전쟁의 종전이 가시화되기 시작하던 1944년에 실시되었습니다. 1944년 당시 나치 독일이 여전히 덴마크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덴마크인들은 이러한 선거를 실시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98%의 찬성으로 아이슬란드 국민들이 독립에 찬성하자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10세 국왕은 국민투표 결과를 축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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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덴마크-아이슬란드 연합법 규정에 따라 양국은 강력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며 아이슬란드는 여전히 덴마크 왕실의 영토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후 같은 해 군주제 종속이 폐지되고 완전한 자치권이 부여되었으며, 스베인 비욘손이 아이슬란드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아이슬란드의 독립은 덴마크와의 문화적 분리, 세계 무대에서의 입지 구축 및 나머지 유럽 본토와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의미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슬란드 국기는 1944년에 법으로 비준되었습니다. 종교적 표현, 언어 보존과 같은 아이슬란드 국민정신의 고유한 가치는 독립 국가인 아이슬란드의 건국 원칙으로 합의되었습니다.
독립 이전과 직후 몇 년 동안 아이슬란드에는 민족주의 물결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로 사가에 뿌리를 둔 아이슬란드 정신과 문화적 산물이 그 기반이 되었습니다.
신화도 서사시도 로맨스도 민담도 아닌 복수, 부, 권력,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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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 시구로손은 아이슬란드 지식인 그룹을 용감하게 이끌고 독립운동을 벌여 아이슬란드 자치 정부를 재창출했습니다. 그는 아이슬란드의 현대적 건국자로 인정받고 있으며, 공식적으로 아이슬란드의 대통령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슬란드 국민들은 그를 욘 대통령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아이슬란드의 역사와 문화
아이슬란드의 국가 독립과 케플라비크 협정에 명시된 퇴거 날짜가 훨씬 지난 후에도 미군은 아이슬란드 주둔을 지속했습니다. 케플라비크 협정은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아이슬란드를 떠나며, 그 과정에서 아이슬란드가 케플라비크 공항의 통제권을 이양받도록 명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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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국 주류 정치계에 반공주의가 빠른 속도로 퍼지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의 핵 공격을 억제하기 위해 아이슬란드의 미군 주둔을 유지해야 한다는 일방적인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이로 인해 아이슬란드에서 광범위한 시위가 벌어졌지만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이슬란드 사람들의 마음속에 외국의 광범위한 개입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게 되었고, 국가 가치 체계에 반하는 정책에 항의하려는 의지가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케플라비크 공항은 1951년 아이슬란드 방위군에게 반환되었지만, 미 해군은 2006년까지 케플라비크 해군 공군기지를 유지했습니다. 2017년에도 미군은 레이캬네스반도에 현대식 공군 기지를 건설하려는 의도를 보였습니다. 1951년 나토 방위 조약에 따르면 미국은 비공개 기간 동안 아이슬란드를 방어할 책임이 있습니다.
대서양 위에 위치한 아이슬란드의 전략적 위치를 고려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닙니다. 아이슬란드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아이슬란드의 지리적 중요성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커졌기 때문입니다. 아이슬란드에 남아 있는 미국의 문화적 영향 또 상당히 큰 편입니다. 지금의 아이슬란드는 핫도그 애호가, 영화광, 로큰롤 음악가, 혁명가들의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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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은 아이슬란드에서의 삶이 대부분 좋았던 시기입니다. 연간 수확량이 부족했던 몇 년을 제외하면 실업률은 낮고 산업이 번성했습니다. 불과 1년 전 미국으로부터 마셜 원조를 받았던 아이슬란드는 194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창립 회원국으로 가입했습니다.
아이슬란드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진 또 다른 10년은 1980년대입니다. 1986년, 아이슬란드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국무장관 간의 핵 감축 논의를 위해 레이캬비크 정상회의를 개최했습니다.
레이캬비크 정상 회의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다행히 다음 해에 문제가 해결되면서 호포이 하우스(Hofoi House)에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1989년,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가 아이슬란드의 대통령이자 세계 최초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여성 국가수반으로 당선되었습니다.
1990년대 아이슬란드 독립당(Independence Party)은 국가 경제개혁을 과감하게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중대 변화와 마찬가지로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아이슬란드 경제는 잠시 침체기를 겪은 후 다시 강력하고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연평균 4%씩 성장하는 아이슬란드 경제는 어업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산업을 다각화했습니다. 아이슬란드는 1994년 유럽경제지역(EEA)에 가입하며 국제 금융 무대에서의 입지 또한 강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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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아이슬란드인들은 은행업을 새로운 주요 산업으로 고려했습니다. 하지만 2008~2011년 신용 경색의 여파로 인해 이는 무모한 꿈인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금융 위기로 수년 동안 누적된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다른 산업을 발전시켜야 했습니다.
운 좋게도 전 세계의 시선은 이미 아이슬란드, 특히 화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화산재 구름에 쏠려 있었습니다. 에이야퍄틀라요쿨 화산 폭발이 전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고,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이슬란드 정부와 관광청 등 다양한 국가 기관들이 아이슬란드를 꼭 가봐야 할 여행지로 홍보하기 위해 힘을 모았습니다.
아이슬란드는 또한 친환경 에너지 생산을 위해 자원을 활용하고 있으며, 수많은 지열 발전소와 수력 발전소용 댐을 건설했습니다. 이는 아이슬란드 지역사회에 엄청난 혜택과 해악을 동시에 가져왔으며, 자연 보전과 에너지원 활용에 대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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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의 역사는 천 년 전 이곳에 세워진 최초의 정착지부터 오늘날의 번영하고 자유롭고 현대적인 스칸디나비아 국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설과 설화로 가득합니다. 이제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건강한 경제와 섬의 천연자원을 바탕으로 밝고 아름다운 21세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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